2008년 영국가수 씰(Seal)이 리메이크 해 당시 버락 오바마(Barak Obama) 미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흑인들의 평등을 위한 시민권운동에 대한 지지로 만든 이 곡은 여러 방향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 하나는 샘과 그의 밴드가 백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모텔에서 묵으려 했을 때이다. 1963년 10월 8일 샘은 홀리데이인 호텔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룹과 함께 도착하자 호텔 측의 프런트에선 이들을 긴장해서 훑어보고는 방이 없다고 말했다. 샘의 형 찰스(Charles Cooke)는 즉각 항의했고 샘도 흥분해서 매니저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고 대답을 듣기 전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샘의 부인 바버라(Barbara)는 그들이 죽일 수도 있으니 참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샘은 “그들은 날 죽일 수 없어, 난 샘 쿡이니까”라고 말했다. 결국 떠나자는 쪽은 샘을 설득했고 혼 악기들을 불고 모욕에 대한 화풀이를 하면서 떠났다. 그러자 이들이 시내의 한 모텔에 도착했을 때 경찰들이 소란죄에 대한 명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곡의 탄생에 있어 또 한 가지는 요소는 1963년 수영장에서 익사한 어린 아들이다. 아들의 죽음을 접한 샘은 상당히 내면적인 성찰을 하게 되었고 정치에 관심을 갖게 돼 흑인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샘은 1964년 2월 7일 자니 카슨(Johnny Carson)의 투나잇 쇼에서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다. 샘은 1964년 12월 11일 모텔 주인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샘이 모텔의 한 방에서 어떤 여인을 강간하려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많은 논쟁이 유발되었고 샘은 자신의 레이블과 저작권회사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원은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곡은 앨범이 나온 지 9개월 만에 그리고 샘의 사망 11일이 지나 싱글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3절은 인종차별을 격화시킬 우려가 있어 편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총기사고, 인종 차별 등등으로 미국은 더러운 나라였던 모양이다. 그들의 주장은 언제나 평화다. 난 누구보다도 우리의 박인수의 전성기때의 노래가 더 훌륭했다라는 생각에서 자료를 모아 이 포스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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