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poetry

자판기 혹은 그녀 - 서안나

loren23 2016. 9. 13. 15:51


















이 해안가 소읍 터미널에서 그녀는 마음을 다 써버렸다. 그녀의 몸에 몇 개의 버튼이 단추처럼 달려있다. 누군가 단추를 풀면 그녀는 온몸을 흔들며 종이컵 가득 소읍의 내력을 따라 준다. 자신을 스쳐간 이야기들을 한 스푼 씩 잘 풀어놓는다. 너무 아픈 것들은 본래 몸에 쌓인 야그들을 다 풀어내야 쓰는 법이 제. 우리 같은 것들이야 멀 알 것 소. 그냥 몸으로 견디는 것이 제.

간밤에 그녀의 몸에 한 줄의 녹슨 문장이 더 첨가되었다. 떠도는 사내가 술기운이 가득 찬 발로 그녀의 몸을 걷어찼기 때문이다. 낯선 손길이 그녀를 스칠 때마다 온 몸으로 사랑이 느리게 퍼진다. 슬픔을 알아버린 몸에 슬픔은 더 이상 독이 되지 못한다. 떠나가는 만큼 새로운 사랑이 들어서는 소읍의 터미널. 인생이란 그런 것이 제. 퍼줄수록 넘치는 법이 제. 기울어 가는 몸을 곧추세우며 터미널 아침를 여는 화장발이 뜬 부석한 얼굴. 누군가 그녀의 몸을 다시 누른다. 그녀는 이 바닷가 소읍 터미널에서 다 자라버렸다.



이 시는 간밤, 술기운 가득한 사내의 발에 걷어차인 여자에 관한 기록이다. 그녀는 해안가 소읍 터미널에 단추을 몇 개 달고, 아니 단추를 달았지만 환히 타놓고 서 있는, 그러니까 낯선 손길을 몸에 머물게 하는 그녀일 수도 있고, 한 구석에 좌판을 펴고 나물을 파는 소읍의 할머니 일수도 있다. 사실은 딱히 누구라고 정하기보다는 "그냥 몸으로 견디는" 민초인 것이다.
자판기를 의인화시킴으로서 민초의 내력을 대변하는 시, 발상이 좋다. 거기다가 "퍼줄수록 넘치는" 정(또는 울림)까지 덤으로 얹어주니 일회용 컵이 넘친다...web.























'music- poetry '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ive Morgan - Window To Paradise  (0) 2016.09.13
Blue & Lonesome / Debbie Davies  (0) 2016.09.13
The rainy night - Yvan Guilini  (0) 2016.09.13
강허달림 - 독백   (0) 2016.09.12
바람의 노래 / 오세영   (0) 2016.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