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빛의 모퉁이에서 -
***
지독한 매혹으로 나를 혹사시켰던 세상.
매혹된 자로서의 나는 거의 소진되었다.
뚜렷한 깨달음이 겨울처럼 냉정하게
내 앞에 버티고 있다.
환멸의 방식으로 거칠게
응답했던 세월들이 이제 뒤에 남는다.
무섭고 외롭다...
음: Lisa Gerrard-the valley of the 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