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poetry

박인수

loren23 2016. 8. 9. 22:51













박인수는 한국에 가족이 없다. 가진 재산도 없고 경제능력마저 상실한 상태여서 기초생활수급대상자다. 증상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노인요양보험 수혜 대상자로도 선정되지 못했고, 요양원 측이 돌보지 않으면 그는 오갈 곳이 없는 처지다. 그는 수년 동안 '과거를 잃어가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애써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선후배 가수들이다. 박인수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 생생한 사람들은 '봄비'를 만든 가수 신중현,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 '봄비'를 자신보다 먼저 불렀던 가수 이정화와 재즈 가수 김준, 가수 박재란 등 선후배 음악인들이다. 가수 신효범과 인순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창력을 칭찬한단다.

박인수는 자신이 부른 애절한 노래만큼 비운의 뮤지션이다. 1947년 함북 길주에서 백병종이란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1/4후퇴 당시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와 어머니와 함께 살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전북 정읍역 부근에서 길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다. 이후 고아원과 춘천 미군부대를 2년간 전전하며 껌팔이 소년으로 연명하고, 열차에서 '신라의 달밤' 등 유행가를 부르며 겨우 생활한다. 그러다가 춘천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하는데, 미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활동을 나온 미국인 토마스의 눈에 들어 1960년 켄터키로 입양되어 켄터키 중학교와 뉴욕 베어모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러나 결국 양부모와의 불화 등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향수병에 못 이겨 1963년 홀로 한국으로 돌아와 미8군에서 하우스보이로 생활을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한글은 제대로 쓰지 못하지만 영어는 할 줄 안다.

미군부대에서 잡일을 하며 연명하던 박인수의 콧노래를 들은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부대 밤무대에 서면서 그의 가수 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미군클럽에서 타고난 음악성과 미국에서 익힌 리듬감으로 노래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쥐어짜는 듯한 특유의 창법이 빛을 보게 된다. '달러박스'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여러 미군클럽에서 그를 앞 다퉈 부른다. 1965년부터 '키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 등 수많은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노래생활을 시작한다. 1966년 '키보이스'와 청계천 3가 센츄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활동하며 일반무대로 진출하고, 1967년부터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여 빼어난 가창력으로 라이브무대의 황제로 통한 박인수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본능적인 음악 감성이 몸에 뱄다고 말한다.

이후 그의 음반녹음은 1969년 펄 씨스터즈의 '나팔바지'란 곡의 백 코러스로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970년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 이끄는 그룹 '퀘션스'의 멤버로 들어가 데뷔앨범에 '봄비'를 불러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쥔다. 1969년 신중현의 곡 '봄비'를 최초로 노래한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반면, 폭발적인 소울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가 신중현의 권유로 재취입하여 부르자 다이나믹한 그의 '봄비'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전하는 음악전도사로 두 장의 독집앨범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의 인기가 한창일 때는 여대생 무리들이 그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이들을 피해 여관이나 호텔 등지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1975년 대마초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박인수는 활동금지의 족쇄를 차고, 진보적인 그의 독집앨범들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발매가 금지된다. 또, 자유분방하고 감성적인 그는 공연을 밥 먹듯 펑크를 내는 등 어느 누구와도 화합하지 못한다. 1972년과 1982년 두 번의 결혼으로 남매를 두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한다.

해금이 된 1980년 박인수는 또 하나의 불후의 명곡 [당신은 별을 보고 울어보셨나요]라는 독집앨범과 1989년 재즈가수인 선배 김준의 도움으로 마지막 독집음반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할 텐데]를 의욕적으로 발표하지만 상의도 없이 잠적해버리는 등의 기행으로 스스로 무덤을 팠고, 1990년대 말부터는 저혈당 등으로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짧은 가수로서의 생을 접게 된다.

박인수는 음악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최고의 가수지만 그의 삶 자체는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한 불우한 환경으로 황폐화된 6.25 전쟁의 희생양이다. 가수 임희숙은 박인수를 가리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소울을 제대로 부르는 나의 우상'이라며 존경을 표시하고, 1960년대 말 소울가요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펄 씨스터즈도 '막 데뷔한 우리들에게 소울 곡에 맞는 제스처와 창법을 가르쳐준 오빠'라며 존경을 표한다. 또한 1970년대 말 남성 듀오 '하사와 병장'의 리더인 후배 가수 이경우, 재즈가수인 선배 김준 등 많은 선후배 가수들이 그를 존경하고 인정하며, 대중들 또한 그를 잊지 못한다.

박인수가 부른 House Of The Rising Sun (해뜨는 집)과 1964년에 Sam Cooke(샘 쿡)이 발표한 A Change Is Gonna Come. 두곡을 올린다. 소개글이 없으면 한국인, 우리의 박인수가 부른 곡 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 House Of The Rising Sun

2. A change is gonna



참고: 박인수-봄비 http://blog.daum.net/eok924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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