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poetry

김선우 시인.

loren23 2016. 8. 21. 20:58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산청 여인숙 여행 마지막날 나는 무료하게 누워 흰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여관이 으레 그렇듯 사랑해, 내일 떠나 따위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벽과 벽이 끝나고 만나는 모서리에 빛바랜 자줏빛 얼룩, 기묘한 흥분을 느끼며 얼룩을 바라 보았다 두 세계의 끝이며 시작인, 모서리를 통해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다래순 냄새가 났다 다른 세상의 대기에 접촉한 순간 놀라며 내뿜는 초록빛 순의 향기, 머리를 받쳐준 그녀는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의 눈 속에서 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으며 내가 말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선 온갖 냄새가 뿜어나왔다 포마이카 옷장의 서랍 냄새, 죽은 방울새에게서 맡았던 찔레꽃 향기, 불에 덴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여름 소나기의 먼지 냄새, 엄마의 속곳 냄새...... 세포 하나하나에 심장이 들어선 것처럼 나는 떨었다 들어왔지만 들어온 게 아닌, 마주보고 있지만 비껴가는 슬픈체위를 버려...... 탄성을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잘 마른 밀짚 냄새,허물어진 흙담냄새, 할머니 수의에서 나던 싸리꽃 향기, 오월의 가두에 흩어지던 침수향을 풍기며 그녀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모든 시공이 얽혀 있는, 단 하나의 모서리로 그녀가 돌아간 뒤,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맡았던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 났다 김선우 시인, 소설가 출생 1970년, 강원 강릉시 학력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 학사 데뷔 1996년 창작과 비평 등단수상현대문학상 외 2건





피어라, 얼레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라고 시인 김선우가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평생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김선우의 글로 그 문장을 보니 새삼스럽다.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 둘은 비교가 가능한 것이 아니니까. 꽃은 꽃이어서 꽃이고 사람은 사람이어서 그냥 사람일 뿐이다. 둘의 문장은 다르고 둘의 이야기도 다르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자꾸 엮어서 말하게 만드나.

김선우의 시를 읽기 전까지 그 꽃을 알지 못했었다. 김선우가 시에서 그랬다. 얼레지의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라고. 바람난 여인은 스스로 물을 주고, 스스로 피어나는 법이다.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스스로의 몸에 얼룩을 만들고, 그 얼룩을 뜨겁게 피워내고, 그 격정으로 바람을 만든다.

나는 김선우의 관능이 좋다. 시침을 떼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는 김선우의 몸과 관능은 머뭇거림이 없어 도도하고 아름답다. 몸과 몸이 만날 때, 누가 머뭇거리나. 뜨거운 순간에 누가 소리를 가만히 삼키나. 김선우의 시가 몸의 관능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김선우의 시는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마다 피어난다. 그곳은 남해금산이기도 하고, 옛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는 방안이기도 하고, 제주 강정마을이기도 하다. 그 어디에서든 그녀는 피어난다. 그 꽃은, 활짝 벌리라고 있는 꽃이다. 소리 없이도 악악 소리지르는 꽃이다. 그래서 그 꽃그늘이 어지럽다. 그러니 그 꽃그늘에 쓰러져 홀로 참숯처럼 뜨거워질 밖에. 이제 보니 알겠다. 왜 자꾸 꽃과 사람을 연결시켜 말하는지. 사람이든 꽃이든 스스로 피어나야하기 때문이다. 벌나비 도움 없이, 비 햇살 도움 없어도, 피어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피어나지 못하면 쪼그라들고, 쪼그라들고 시들면 죽음이니... 어찌하겠는가, 피어나야할 밖에.
(소설가 - 김인숙).


촉촉하게 젖은 꽃잎을 연상시키는 김선우의 시는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오는 물기란, 젊음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둡고 따뜻한 자궁 속에 출렁거리고 있는 양수에 가깝다. 그녀의 여성성이 발산하는 새로운 빛은 이 양수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다. 그 속에 숨쉬고 있는 너무도 많은 누이와 어머니와 노파들은 각기 태아이면서 동시에 산모이고 산파이기도 하다. 그 둥근 생명들을 산란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 운주(雲住)에 누워 있다. 곧 물의 살을 찢고 눈부신 가시연꽃이 필 것이다.’

희귀하게도 식물 중에서 1속1종인 가시연꽃, 크게는 연꽃잎이 2m가 넘기도 한다. 그 가시연꽃은 부처가 이 세상에 와 잠시 앉았다 간 자리처럼 넓고 컸다. 각성한 부처의 마음자리는 그 크기와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대한 가시연꽃잎을 보면, 그 자리에서 피어 오른 연꽃을 보면 인간의 각성이란 저런 것이지 싶을 때가 있다. 연꽃잎 중앙으로 피어오른 가시연꽃은 관능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김선우는 저런 시를 쓰는구나 싶다. 나는 아주 잠시 그 연꽃잎에 맺히는 물방울이 됐다가 떨어졌다. 김선우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가시연꽃을 찾아 운주로 떠난 모양이다.

가시연꽃을 찾아 단 한번도 가시연꽃 피운 적 없는 운주사에 가네 참혹한 얼굴로 나를 맞는 불두, 오늘 나는 스물아홉살
이십사만칠천여 시간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나의 시간은 늙은 별에 닿지 못하고 내 마음은
무르팍을 향해 종종 사기를 치네
엎어져도 무르팍이 깨지지 않는 무서운 날들이 만가도 없이 흘러가네

운주에 올라, 오를수록 깊어지는 골짝, 꿈꾸는 와불을 보네 오는 나는 열아홉살
잘못 울린 닭울음에 서둘러 승천해버린, 석공의 정과 망치 티끌로 흩어졌네 거기 일어나 앉지 못하고 와불로 누운 남녀가 있어 출렁, 남도땅에 동해 봄바다 물밀려오네

참 따뜻하구나, 물속에 잠겨 곧 피가 돌겠구나
걷지 못하는 부처님 귀에 대고 속삭였네
달리다쿰, 달리다쿰! 누가 자꾸 내 귀에 대고 소녀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지만   
‘雲住에 눕다’ 중에서 -

(시인 - 원재훈)

음:Eclipse of the moon - Brian C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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