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이후 2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천지개벽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체제가 변했다. 하지만 형태만 바뀌었을 뿐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유녀(遊女)들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세상의 뒷골목에 붉은 조명을 켜놓고 남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슬픈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간이 많이 나빠져서 독주를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녀는 걱정하는 눈치였다 다음날, 양주를 시키자 얼른 가지고 왔다 (졸시 「첫 만남」) 건강을 걱정해 주면서도 비싼 양주를 시키자 ‘얼른’ 가지고 나오는 그 여자를 인천의 어느 작은 카페(술집)에서 만났다. 나는 그 여자가 밉지 않았다. 간을 걱정해 주던 그 순간도 그의 마음은 진짜이고, 양주를 팔고 싶은 다음날의 마음도 진짜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름과 가을이 다 가도록 이삿짐을 풀지 않은 그녀의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 아기를 빼앗기고 여기 저기 묶어둔 자해의 기억들이 숨 쉬지 못하여 가슴 깊이 썩어가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방구석 과거의 빈틈에 쪼그려 앉아 밥을 해결하고 늦은 오후에 화장을 하는 그녀. 손님으로 왔던 사내들 몇 명 그녀의 방과 육신을 밟듯이 다녀갔지만 생애가 다 저물도록 무겁고 아픈 짐을 풀어주지 못했다. 고아처럼 울던 저녁과 아침 한숨을 다 모아 세상에 바람이 불고 마스카라를 지우며 눈물이 눈처럼 펑펑 내렸다. 버림받기 전에 그녀의 가게 앞 가로수 큰 잎사귀들은 스스로 손을 놓고 저승의 바닥으로 뛰어 내려서 행복은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대접으로 마시고 욱신거리는 뼈마디에 알약을 털어 넣고 날마다 출근하였다. 밤새 팔아야할 웃음을 퉁퉁 부은 얼굴에 분바를 때만 하루 딱 한 번 거울에게 홀로 살짝 귀신처럼 웃어보였다 풀지 않은 짐들이 풀릴 때까지 담배냄새 짙은 모르는 사내들의 어깨에 기대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그녀는 미쳤지 미쳤어 식어가는 피처럼 남은 정을 팔아 목숨을 이었다. 툭 불거진 뱃살 쪽으로 기울어진 가슴과 가늘어진 사타구니에 팁을 붙이고 해장국 손님을 따라 나선 첫 눈 내리던 아침엔 거리에서 강아지새끼처럼 날뛰며 좋아라고 실컷 울었다. 잃어버린 아기의 꼭 쥔 주먹덩이 같은 눈이 허공을 타고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이삿짐 풀기」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갖은 고생을 다한 그 여자의 이력은 어린 나이에도 거칠게 부르튼 손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들락날락 처음엔 쫓겨나고 두 번짼 도망쳤다. 이 태만에 붙들려 들어가 남의 집 살듯 못된 놈 만나 살며 하루도 몸 성할 날 없었다는 그대. 그 날도 별 이유 없이 뒤안으로 끌려가 죽도록 맞고 남편 몰래 너무 아파 겁먹고 또 다시 삼 년 만에 짐싸들었다 한다.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꼬옥 간직해라 성경책 안겨주고 세 번째로 아주 집을 나왔다 한다. 못된 애비에게 눈물자국 들킬까 그것이 더 무서운 다섯 살 아들은 엄마야고 소리치지도 못하고 울며불며 매달리지도 못하고 성경책 받아들고 사시나무 떨듯 떨더라 했다. 엄니 인자 다신 안옹가? 엄니! 이 성경책 내가 커서 아들 낳아도 조야됭가? 눈 껌뻑여 눈물 삼키며 속으로만 울더라 했다. 그 어린것이 에미 떠난 뒤 아주 멀리 영영 떠나버린 뒤 애비 몰래 뒤안으로 돌아가 그날 밤 그제야 털썩 주저앉아 성경책 붙들고 목 놓아 울더라 했다. 성경책도 눈물을 흘려주더라 했다. 그대 없는 동안 어린 아들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머서마가 밥을 다 할 줄 아능구마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 「역사」 말은 나오면서 곧 들어가서 꼬리만 살짝 입술에 걸릴 때가 많았다. 말꼬리 잡는 취객의 짓궂은 입놀림에 걸려 슬픈 이야기가 새 나오는 걸 막으려는 것인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꼭꼭 깨물기도 하였다. 텅 빈 운동장 같은 눈으로 먼 곳을 보며 한숨을 토할 때는 어릴 적 팔려가던 우리 집 소의 젖은 눈을 닮았다. 까슬까슬하게 마르고 거친 손만 빼면 그 여자는 천상 여자의 몸을 가졌다. 가늘고 긴 목, 도톰한 입술, 큰 눈, 넓은 이마와 예쁜 눈썹을 가진 그 여자를 무척 많은 사내들이 따랐다. 속을 터놓는 친한 말벗이 되고부터 내게는 술값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매일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여자의 가게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낯선 사내들 앞에 앉아 술을 따르는 것이 언감생심 보기 싫었다. 화를 내고 나오면 그 여자는 울면서 전화를 했다, 장사하는 거니까 봐달라고. 사실 내가 그 여자를 봐주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 여자는 내게 슬픈 일 기쁜 일 모든 걸 보고하듯이 말했다. 가게 문을 닫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나는 점점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전화가 없는 날은 내가 찾아가기도 했다. 늦은 밤 그녀의 술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웃고 있었다. 가슴이 뛰고 숨이 차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문을 열고 쓰러질 듯 나와 울면서 술을 마셨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어디서 뭐하고 있기에 오지도 않느냐고 그녀는 화를 냈다. 화를 내다니 ·고마웠다. - 졸시, 「고마움에 대하여」 남자는 이른바 스폰스였다. 가게도 그 남자가 차려준 것이었다. 남자는 정부기관의 고위관리로 있다가 정년퇴직하고 정부에 물품을 납품하는 큰 업체의 사장으로 있는 자였다. 여자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필요에 의해서 만난다고도 했다. 내게 그걸 굳이 설득시킬 의무도 없었지만 나를 설득시켰고, 나는 이해할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여자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여자를 위해 나는 몇 편인가 시를 써주기도 했다. 여자는 시를 액자까지 하여 가게에 걸어놓았는데 남자가 와서 부숴 버렸다. 영문도 모르는 내게 액자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며 찢어진 종이에 씌어진 시를 읽어 주었다. 슬프고 초라한 낭송회였다. 감나무 높이 걸터앉아 서울로 간 친구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썼다던 열여섯 그대가 지금은 카페에 앉아 술을 따르는 마담이 되었네 술잔 속에 강진 갯벌 바람소리 있는가 열여섯 감나무에 걸리던 노을이 붉은가 그대여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만 남동항의 바람이 서럽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와서 술집을 차리고 긴긴 겨울밤을 다 새워 취하고 있는가 그대는 취하여 버릇처럼 울음을 터트려 울음 속에 보는 강진바다 수평선이 아득하구나 손잡고 돌아가자 꿈결에라도 강진 갯벌 말랑말랑한 발자국 남기며 감나무 가지 굵은 곳으로 올라가 보자 서울이 보일까 흰머리 희끗거리며 바람에 흩날리는 세월이 보일까 손님이 일찍 끊어진 오늘 매상이 걱정이어서 창밖에는 폭풍우가 몰려온다 가난과 슬픔이 잠시라도 휩쓸려 가겠지 술이 깨면 나는 폭풍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는 남아, 몰래 찾아드는 새벽 손님을 받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어라 목울대를 넘어 범람하는 서러움 아침이 천천히 와서 또 아주 그렇게 꿈속의 고향을 살아 보아라 - 졸시 「남동에서 만난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겨울날 그 여자는 느닷없이 세상을 등졌다. 교통사고였다. 술 취한 그 남자의 차를 탄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정신이 허황해졌다. 눈이 내리면 눈을 좋아하던 그 여자가 오는 게 보였다. 세상에 없는 그 여자가 세상 어느 곳에나 보였다. 새벽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마음속의 것이 진짜처럼 뽀드득거리며 눈 위에 찍히고 있었다. 지금도 그 여자가 하던 가게 자리를 지나갈 때면 죽은 여자가 보였다. 죽은 할아버지의 속옷 같은 냄새와 여자의 화장품 냄새가 곰팡이처럼 떠다니던 곳. 담배 연기 속, 옷을 벗은 여자가 늘 같은 달 달력에 붙어 있던 곳. 재떨이마다 타다 버린 생이 끈적한 가래에 빠져 있던 곳. 만취한 사내의 손이 여자의 깊은 곳을 휘저어 비명을 움켜잡던 곳. 사랑했던 여자가 울며 매달리던 곳. 생계를 이어가던 곳. 오랜만에 찾아 갔을 때, 전세 놓음, 글자가 발길을 돌리게 하던 곳. 가게 닫은 지 오래됐어요, 화장 짙은 그 여자 이사 갔어요, 담배 가게 남자의 대답이 가슴을 치던 곳. 어두운 창문 너머 깨진 술병 몇 개가 귀신처럼 앉아 아직도 손님을 기다리던. 졸시 「슬픈 글자만 남았습니다」 음 : Still Going "Untitled Love" 김주대 - 89년《민중시》, 91년《창작과 비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 시집 『도화동 사십계단』,『꽃이 너를 지운다』,『그리움의 넓이』등 |
'music- poetry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선우 시인. (0) | 2016.08.21 |
---|---|
S'agapo - Giannis Parios (0) | 2016.08.20 |
Andrea Bocelli - Besame Mucho (0) | 2016.08.20 |
질투가 그려낸 사랑의 기호들 - 김주대 (0) | 2016.08.18 |
Hidden Keys (감춰진 열쇠) - George Dalaras (0) | 2016.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