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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가 그려낸 사랑의 기호들 - 김주대

loren23 2016. 8. 18. 17:24










질투가 그려낸 사랑의 기호들


신윤복의 사랑 - 미인도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 황진이는 죽음 앞에서 “나는 천하의 남자들을 위해 살다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못한 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덮지 말고 동문 밖 모래와 물이 있는 곳에 시신을 버려두라. 그리고 갖은 미물들이 내 몸을 뜯어먹게 하여 천하의 여자들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라.”(조선시대 시인 김택영의 시문집『소호당집』)고 하였다.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 수많은 사내들의 동경과 연모의 대상이었던 황진이조차 이런 비극적인 인식에 도달해 있었으니 기생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신산스러운 것이었던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천지개벽의 변화가 있을 수 없었던 시절. 한번 기적(妓籍)에 오르면 평생 빠져나갈 수 없는 천민의 신분으로 천역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곤장과 죽음만이 기다렸던 기녀의 생. 그 답답한 삶의 한가운데로 갓을 쓴 사내든 붓을 든 사내든 사랑이 찾아온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한번쯤 세상없는 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도록 태어난 인간 목숨의 본래 면목에 이르는 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삶의 뜨거운 한복판에 던져져 울고 웃고 사랑했을 한 여인의 삶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남아 혜원으로 하여금 ‘미인도’를 완성하게 하였다, 그것도 옷고름을 푼 채로.

철저한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남녀사이의 예절을 강조했으며 남녀 간의 사랑을 부끄럽고 낯 뜨거운 일이라 하여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멀리했던 조선시대, 내외법이 있어서 집의 구조도 안채와 사랑채로 엄격하게 분리되었던 시대에 여자가 옷고름을 풀고 자신을 타인의 시선 앞에 드러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혜원의 붓 앞에 선 여인은 여염집 규수가 아니라 처신이 비교적 자유로운 기방 여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양반 사대부들의 문예적 흥취의 보조자였던 기녀들은 때로 욕정에 불타는 양반들의 쟁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은 가늘고 긴 목, 오똑한 코,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 듯한 매혹적인 눈빛, 보드라운 볼살과 매끄럽고 도톰한 손등을 가진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다. 붓을 든 혜원과 그의 앞에 옷고름을 풀고 서 있는 이 여인은 권력양반들의 시선을 피해 서로 지극한 사랑을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혜원의 생몰 년대와 생애는 불분명하다. 다만 성호 이익의 손자인 이국환은 혜원이 ‘방외인 같고, 여항인들과 어울리며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지낸다’고 하였다. 방외인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 혜원의 예술가적 기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그의 태도로 보아 그가 순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동가식서가숙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만나 이루어진 사랑이라면 미인도 속의 여인을 집에 들여앉혀 먹여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정식 부부로 살지 못하고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를 뭇 사내들의 탐혹의 대상인 기녀로서 인정해야 하는 혜원의 자괴감이 때로는 질투로 때로는 그림에 몰두하는 편집증적 예술행위로 폭발했을 것이다. 여항을 비교적 자유롭게 떠돌며, 지배질서 내 권력층의 이중적 태도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풍속화를 많이 그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첫 번째 법칙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으로 질투는 사랑보다 더 깊고 또 사랑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즉 질투는 기호를 파악하고 해석할 때 사랑보다도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질투는 사랑의 목적지이며 사랑의 최종 도달점이다.”



질투에 빠진 남자는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사건, 현상, 사물들이 의미 있는 기호로 다가온다. 그 기호를 해석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섬세하게 대상에 몰입한다. 위대한 예술은 거기서 시작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목덜미에 난 가는 털은 물론 눈동자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다문 입술의 아래 위 도톰한 정도의 차이와 색깔까지 혜원의 눈을 피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가는 어깨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치마의 풍요로운 곡선 속에 감추어진 여체는 혜원의 눈이 아니더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설레게 한다.

미인도의 핵심은 눈빛에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앞쪽을 바라보는 시선인데, 시선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선의 대상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노리개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는 혜원도 아니다. 여인의 시선은 발아래 앞쪽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내부로 깊이 향하고 있다. 골똘하게 무엇에 빠져있는 듯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혜원은 그 눈빛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단순히 행복이냐 불행이냐로 무 자르듯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기녀의 운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붓 끝에서 흘러나왔을 것이다.

미인도 외에도 혜원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징은 눈빛에 잘 나타난다. 혜원은 지극히 가는 붓으로 콩알만한 얼굴에 여인들의 미묘한 감정을 신비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대상이 된 여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질투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음: To Dori / Stamatis Spanoudak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