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poetry

붉은 입술이 건네는 불협화의 언어들- 권채린(문학평론가

loren23 2016. 5. 24. 11:34




1),

배영옥의 첫 시집을 펼쳐 든 자들은 아마도 익숙한 언어들이 낯선 의미와 정서로 발산되는 서늘한 풍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언표된 시어는 본래 지닌 바의 경계를 범람하거나 비껴가는 이질적 흔적을 자신 안에 아로새기고 있다. 흔적은 대부분 부재와 공백으로 처리되지만, 배영옥의 시는 그 흔적을 동력 삼아 지시된 언어를 불완전하게 유동시키고 스스로를 파열시킨다. 주어진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지 못하는 공백, 이 두 항이 서로의 결핍을 형형히 환기하는 이상한 결속 속에서 시어는 작동한다. 그래서 배영옥 시의 언어는 언어가 말하지 못한 모종의 부재들, 가령 틈, 간극, 허공, 자취와 더불어 쓰여진다. 시의 독특한 미학적 자질이 형성되는 것은 바로 한 번도 언표되지 않은 그 공백의 자리로부터이다.

언어의 공백이란 본래적으로 언어 안에 내장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진 결렬과 불화의 흔적일는지 모른다. 친근하면서도 낯선 인상들의 기원에 대해 탐색하면서 프로이트는 ‘heimlich’(친숙한, 집 같은)라는 단어가 애초에 ‘unheimlich’라는 상반된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다. 이때 ‘un-’이란 접두사는 한 몸을 이루던 것들로부터 유리된 억압과 배제의 표식이다. 서로 상이해 보이는 것은 실은 대립되지도 무관하지도 않다. 지워진 ‘un-’의 자취를 더듬고 그것의 기미를 시어 속에 온전히 되살려 감각해내는 것이야말로 언어의 예술인 시가 할 수 있는 한 지고한 성취가 아닐까. 그럴 때 모든 시어는 필연적으로 스스로와 동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타자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불협화’의 산물이 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 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부분


비둘기들의 간격은 정확하다
전선 위에 서로 다른 눈길들만
허공에서 겹쳐졌다 흩어진다
어떤 시선도 다신 되돌아오지 않는다

서로 엇갈리지도
서로 가로지르지도 않는
전선 위의 평화

구구구
까맣게 타버릴
저 어두컴컴한 소리들, (전선 위의 평화) 부분


두 시에서 강렬히 감지되는 것은 채워질 수 없는 외로움과 갈증의 정서이다. 다만 그것은 결코 말해지거나 지시되지 않음으로써 감지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에서 화자는 ‘단단한 어둠’을 껴안고 자신의 꿈과 상처를 읽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절실히 갈망한다. 있는 그대로 “내 삶의 그림자”를 프린트해주는 복사기야말로 어떠한 왜곡이나 거절 없이 ‘나’를 이해하고 납득해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열기를 뿜어내는 복사기에 온몸이 달아오르는 관능적인 체험은 소통에 대한 화자의 갈망이 얼마나 농밀한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납작하고 뚜렷하게” 혹은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리는 꿈과 상처의 형상들 앞에서 느껴지는 것은 온전히 읽히지 못한 자의 또 다른 외로움과 절망이다. 복사기가 깊고 환하게 자아를 관통할수록 치유되거나 위로될 수 없는 상처도 깊고 환해진다. 그래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라는 진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 대한 ‘읽기’가 온전하게 성취될 수 없는데 따르는 결핍과 불안, 상처의 흔적을 꾹꾹 자신 안에 새기며 탄식을 흘리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전선 위의 평화」에서 새롭게 읽히는 것은 ‘평화’라는 말의 함의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질서정연하게” 정확한 “간극”으로 앉아 있는 전선 위 비둘기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화의 가능 요건에 대해 알게 된다. 타자와의 ‘간극’이 항상 안타까운 것만은 아니다. 이렇듯 적당한 ‘거리’의 정치학 속에서 평화는 유지된다. 그러나 “서로 엇갈리지도/서로 가로지르지도” 않는 평화란 서로에게 가닿지 않을 “어두컴컴한 소리들”을 내포한다. 간극은 평화의 요건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심연이고 상실이기도 하다. 그럴 때 평화는 존재론적 고독을 말해주는 알리바이의 일종이 된다. 그렇게 ‘평화’라는 말은 결코 온전히 수긍할 수 없는 결핍과 허위로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은 자기 시 안에서 언어에 대한 고유한 사용권을 지닌 자이다. 배영옥의 시어는 모종의 불협화를 견지하고자 하는 고집스런 태도로 충만하다. ‘웃음’은 죽음 뒤에 도달할 수 있고(「웃음의 왕국」), ‘죽음’은 울음으로 번지지 않으며(「풀밭 위의 악몽」) ‘유쾌함’은 슬픔을 넘어서 나온다(「유쾌한 성묘」). 한 언어에 연동되어 따라오는 계열화된 이미지나 관습적 연상의 고리를 은근하게 끊어버리거나 헐겁게 만들어버리는 모습은 배영옥 시에서 흔하게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핏속에 흐르는 불협화”(「풀밭 위의 악몽」)라는 말은 단순히 시적 수사로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배영옥의 전체 시편 가운데 ‘고향’이나 ‘유년’을 모티프로 하는 시들은 다른 시들에 비해 훨씬 강렬하고 낯선 이미지로 주조되어 있다. 시간의 원근 감각이 도착된 듯이, 유년의 한 페이지는 시간의 낙차를 지운 채 현재에 들끓는 생생함으로 소환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 한가운데 기다랗게 누워 있던 기찻길이 사라졌다 먹구렁이 한 마리가 담장을 넘던 날이었다
그날부터 병석에 누워있던 영천 아재 등짝에선 욕창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천 아재는 밤마다 대가리를 쳐든 먹구렁이가 자신을 집어삼킨다고 헛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대처로 내달리던 기찻길은 사라졌지만 비린 쇳내는 여전히 마을을 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두웠으며 담벼락과 점점 더 멀어졌다 온 동네에 불임의 꽃들만 피어나고 있었다
골짜기에 겨울이 오고 가고 백년 만에 폭설이 내렸지만 기차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죽은 자들만이 기차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욕창이 번진 영천 아재는 끝내 먹구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부터 먹구렁이 눈빛 같은 뭇별이 총총, 밤마다 기찻길을 비추고 있었다. (먹구렁이가 담장을 넘던 날) 전문



시집 제목 ‘뭇별이 총총’이 제 안에 품고 있는 세계는 이토록 그로테스크하다. 유년 시절의 무대로서의 ‘기찻길 동네’는 합일과 귀소의 장소가 아니라, ‘욕창’, ‘헛소리’, ‘불임’으로 상징되는 불모와 유폐의 공간이다. 마을을 횡단하는 기찻길은 유일하게 ‘바깥’의 삶을 꿈꾸게 하는 통로이지만 그마저도 ‘먹구렁이’의 음험한 기운 앞에 사라져버린다. 정상적인 성장을 멈추고 ‘기차’와 ‘먹구렁이’의 사이의 분열증적인 자장(磁場) 속에서 성장통을 치렀던 불온한 고향의 이미지는 배영옥 시의 내밀한 배후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어두움으로만 기억되어선 안 된다. 욕창과 불임으로부터도 ‘꽃’은 피어나고 ‘뭇별’은 총총 뜬다. 시인에게 유년의 한 페이지는 성장과 죽음이, 불안과 동경이 너무나 가까이서 인력과 척력을 발휘하는 기묘한 공존의 세계로 기록된다. “영혼들을 무심히 받아먹”는 기차와 강물의 적의를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로서 삶 속에 받아들인(「바퀴는 무럭무럭 자란다」) 자에게, 합일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가까이에 존재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은 선험적인 본질로서 각인되어진다. “먹구렁이 눈빛 같은 뭇별이 총총”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산란(散亂)과 유동성이야말로 어쩌면 시인이 유일하게 확증할 수 있는 세계의 본질일 것이다.



2),

시인은 ‘생’보다는 ‘죽음’에 “번번이 마음을 빼앗기”는 자이다(무량사 가는 길」). 죽음과 더불어, 죽음을 통과해 성장한 자에게 죽음은 삶보다 더 친연적이며 강렬하다. 배영옥 시에 난만(爛漫)한 죽음의 풍경들은 결코 정지와 침묵의 상태가 아니라 소멸하는 것들의 생동하는 국면 속에 위치한다. 꽃이 지기 전의 “짧고 짧은/반작용의 한 순간”에(「한순간」), ‘숨소리’와 ‘검푸른’ 기운이 대치하고 섞이는 기괴한 공기 속에(「측백나무 검푸른 잎들」), 죽음은 삶인 듯 살아있듯 그렇게 ‘지척’에 있다. 때문에 죽음은 개별자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가 변환하는 ‘순간’에 대한 사유이며 타자와 연루된 관계론의 문제이다.


붉은 알집들,
눈동자가 젖어들고 있다
방울토마토가 플라스틱 접시 위에 놓여있다 탱탱하게
부풀어 있다
붉게 타오르고 있다
상 위에 접시 위에 네 눈동자 위에 놓여있다
부풀어 오른 방울토마토가 흐르는 물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각의 링 위에
일회용 플라스틱접시 위에
수많은 눈동자 위에 방울토마토,
곧 잊혀질 네 눈동자 위에
터지지 않는
피막(皮膜)으로. (상가(喪家)에서」 전문)


시인이 죽음에서 읽어내는 것은 의외로 ‘붉음’이다. 붉음이란 단일한 색채도 단일한 속성도 아니다. 경계에서 경계로 이동하는 운동의 에너지이며 극한의 지점을 향해 들끓는 소멸의 역능이다. 소멸하는 것들이 ‘마지막 안간힘’으로 전심전력한 생의 집중이 거기에 있다. 죽음이 삶으로, 삶이 죽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맞닥뜨리는 날카로운 존재의 임계점으로부터 ‘붉음’은 “탱탱하게 부풀어” “타오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붉음의 운동성이 존재 내부로부터 발화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식탁 위 방울토마토를 응시하는 누군가의 ‘젖어든 눈동자’에 의해서이다. 부풀어 오르는 “붉은 알집”의 탄력과 생동은 사자(死者)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슬픔의 밀도와 맞먹는다. “상 위에 접시 위에” 놓인 방울토마토가 “네 눈동자” 위에 “터지지 않는 피막”으로 나타나는 장면에서, 타인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소멸되지 않는 생생한 실재로 각인되어진다.

이렇듯 모든 사라지는 것은 그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하거나 변환한다. 개의 주검을 실어 나르는 ‘파리들’에 의해 ‘똥개’라는 이름의 혐의가 지워지듯(「똥개」), 연못의 ‘파문’이 못의 바닥에 제 모습을 새겨놓듯이(「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존재는 다른 국면에서 자신의 ‘환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배영옥의 시에서 사위어가는 것들의 ‘환함’은 주로 희미한 흔적과 자취로, 혹은 틈 ․ 간극 ․ 허공 같은 공백들로부터 발견된다. 그것들이 모두 부재 처리되곤 하는 세계의 주변부나 극지라는 점에서, 시인의 시선은 죽음과 소멸이 갈래를 뻗고 있는 언저리 어디에선가 늘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붉음’이 그랬듯, 그곳으로부터 시인이 발견해 내는 것은 부재하는 것들이 지닌 삶의 동력과 형상들이다.


하지만 사내가 상대보다 먼저 제압해야 하는 건
새파랗게 날을 세운 공기들이다
경기의 승패는 바로 공기를 제압하는 데서 결정될 것이다.
(중략)
사내의 주먹도 링을 가득 채운 함성이
공기의 함성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링 안의 공기가 내뱉는 거칠고 탁한 신음소리가
자신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임을
은연중이라도 알게 된다면
사내는 틀림없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링이 있는 풍경) 부분



이 시에서 링의 주인공은 파이터가 아닌 “새파랗게 날을 세운 공기들”이다. 파이터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이 “공기가 내뱉는 거칠고 탁한 신음소리”로 되살아나는 세계에서, 공기는 보이지 않는 ‘무’나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보다 기민하고 보다 실감나게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럴 때 허공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흘러나가 제 몫의 질량으로 보존되는, 존재의 연장(延長)에 가깝다. 그리하여 몸을 빠져나간 것은 어딘가에서 형형히 자신을 밝히거나 다시금 되돌아온다. 여닫이문을 여닫는 손의 체온과 힘이 “환하게 닳”은 흔적으로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흔적」).

배영옥 시에서 삶의 에센스는 늘 ‘언어’나 ‘몸’을 초과한다.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은 존재의 내부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흘러나와 ‘외부’가 된다. 그래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갈급함은 모두 “몸 밖”에 있다(「그림자」).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여백의 공간이야말로 나를 비롯한 무수한 타자들에게서 흘러나온 삶의 형질들이 뒤엉켜 숨 쉬는 혼종적인 우주일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내면의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내부에서 외부로 번지는 파장”(「풀밭 위의 악몽」) 속에서 자신을 방출하고(「주름」) 동시에 타자의 기미를 ‘받아안는다’.(「흔적」, 「그래서 새는」) 몸의 안과 밖, ‘나’와 ‘나’의 외부가 동일한 함량으로 대등하게 맞닿아 있듯이, 비우는 작업과 받아안는 작업은 등가적이다. 전자가 나의 ‘환한’ 소멸과 관련 있다면, 후자는 타자에의 갈망과 연관된다. 성숙한다는 것 혹은 늙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나를 비우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이것은 흔히 연상되는 선(禪)적인 구도가 아니라 매우 관능적이고 농밀한 ‘변신’의 욕망과 관련된다. 아래의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해저 오천 미터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는 뱀파이어오징어를 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의 발광, 한 줄기 빛이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을 본다 거대한 몸을 흔들며 뱀파이어오징어가 화면 밖으로 헤엄쳐 나온다 방안 가득 남태평양의 푸른 바닷물이 출렁인다 플랑크톤처럼 떠다니는 은빛 햇살들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 몸속에서 발광하는 이 목마름은 무엇인가 혈관 속에서 푸른 포말이 출렁인다 푸른 동공 사이로 흐르는 심해의 바다, 천장에서 바다 눈(marine snow)이 쏟아지고 있다 나는 바다 눈을 삼키며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동공들을 주워 담는다 온몸 가득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방, 나도 모르게 나는 조금씩 퇴화하고 있다 검은 커튼에 가려 수심 오천 미터 방바닥을 헤집고 있다 눈동자에 모래알들만 가득 흩날린다 푸른 방은 간 데 없고 겹겹 이불 속에서 마른 물보라가 인다. (푸른 방) 전문


시인은 굳이 ‘퇴화’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것은 생물학적 변이의 결정론과는 무관한, 능동적이고 절실한 변신의 욕망으로 읽힌다. ‘나’와 ‘뱀파이어오징어’의 경계가 흐려지고 스스로 뱀파이어오징어가 되어가는 퇴화의 욕망은, 앞서 말한 비우고 받아안는 작업의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흥미로운 것은 퇴화의 결정적 요건이 ‘눈(眼)’의 상실로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동공들”이 나를 비우는 과정을 상징한다면 동시에 “바다 눈을 삼키”는 것은 타자를 받아안는 일과 같다. ‘바다 눈’은 엄밀하게는 ‘marine snow’이지만 어둠에 익숙한 뱀파이어오징어의 ‘눈(眼)’ 혹은 ‘푸른 동공’과 연동될 수 있는 유사 계열체로 다가온다. 그럴 때 (자신의) ‘눈’을 버리고 (바다) ‘눈’을 삼키는 행위야말로 가장 명징한 ‘변신’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이야말로 근대 이래의 세계 속에서 가장 강력한 권능을 행사하는 신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윤곽을 명료하게 응시하는 대신 “검은 커튼에 가려” 혹은 “겹겹 이불 속에서” “마른 물보라로” 흩어지는 화자의 모습에서, 내 안의 과잉된 역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읽힌다. 그럼으로써 배영옥이 말하는 퇴화란 삶을 구획하는 불필요한 경계선들을 지우고 욕망의 결정(結晶)들과 본질적인 자유를 기어이 찾아 품고자 하는 존재론적 전회(轉回)와 관련된다. 비우고 받아안는 작업이 궁극적으로 노정하는 바도 이와 같다. 물론 “푸른 방”이 “겹겹 이불”로 되돌아오는 격절과 상실조차 고스란히 받아안는 것이 시인의 몫이다. 「주름」에서처럼 내 안의 ‘울음’조차 밀어내고 헐거워지는 일, 그래서 벽돌 한 장의 무게만큼 생을 짊어지고 가는 일(「벽돌 한 장」)이 그리 녹록할 리 없다. 그 고단한 삶의 국면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가볍고 용이하게 타자의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



3).

시인은 몇 편의 시에서 또렷하게 ‘너’를 호명한다. 그러나 호명하지 않는 순간에도 배영옥 시의 모든 발화는 ‘너’를 향하고 있었다. 언어에 새겨진 불협화의 흔적이 그러했고, 사물의 흔적과 자취, 틈과 허공, 죽음과 소멸이 그러했다. 나의 안에도 너는 있고, 부재의 틈새에도 너는 있다. 외부가 나의 연장이듯 너는 나와 다르지 않다. 「그림자」는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신화의 한 장면을 새삼 환기한다. 나르시스의 비극은 어쩌면 물속에 비친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고 타자가 실은 나와 필연적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에 있다.

그렇다면 타자에의 ‘연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배영옥 시에서 그것은 ‘나’에 대한 재인식과 재규정, 즉 ‘내가 나일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오히려 주체의 자명성을 가져왔다면, 배영옥의 시에서 자명한 것에 대한 의심은 “나도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고장 난 풍금」)라는 생각으로 번진다. 그것은 데카르트적 사유가 주체 밖의 사물들을 수학적으로 계산가능한 단일한 실체로서 대상화한 것과 달리 배영옥은 타자들을 무엇으로도 쉽사리 대상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선의 방향은 역전되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읽는다’. 주체는 타자의 응시 속에서 성립한다. ‘나’는 “누군가의 손끝에 따라 울고 웃는/꼭두각시인형”이다. ‘퇴화’라는 단어가 그러했듯이, ‘꼭두각시인형’에서 느껴지는 것은 주체의 실종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비동일화의 의지이다. 다시 한 번, 배영옥 시의 기저음(基底音)이 ‘불협화’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불협화는 ‘나’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책표지는 대부분 무표정하다, 책에겐 표정이란 게 없다
표정을 보여주는 건 등뿐이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쾌하게 때론 슬프게
유리벽은 등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옮겨 적는다
사람은 등을 기억하지 못해도
유리벽은 등을 기억한다

내가 등을 기댄 유리벽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유리벽의 독서) 부분


눈의 퇴화를 욕망할 만큼 시인은 시각(視覺)에 모종의 불신을 지닌다. 이 시에서는 ‘눈’의 기능이 아예 주체로부터 주체 밖으로 이양되어 있다. 타자의 표정은 ‘나’의 눈으로는 감지되거나 재현되어질 수 없지만, “유리벽”의 눈으로는 가능하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표정”으로 책을 보지만 모르는 사이 유리벽은 “등의 표정”을 읽고 기억한다. 타자의 진심은 마치 얼굴이 아닌 ‘등’에 있다는 듯, “등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개별자들은 어느새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비로소 연결된 채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리벽’은 시인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데 있어 견지하는 하나의 장치적 사유에 가깝다. 그것은 ‘나’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기억’되며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는, 즉 타자에 의해 비로소 온당해지는 주체의 자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미정(未定)으로 존재하는 주체란 늘 결핍된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주체는 이미 타자와의 은밀한 조우 속에 놓여 있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존재는 따뜻한 관계론을 위한 통로가 아닌, 삶을 왜소화시키는 차가운 도시적 삶의 기제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CCTV는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보는 빅브라더, 도시의 “포식자”이자 “올가미”이다.(「CCTV」) CCTV가 ‘그림자’보다 더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의 알리바이로 작용하는 섬뜩한 현실(“그대의 그림자가 그대를 버릴 수가 있다”)에 대해 시인은 비판적 시선을 표출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란 어쩔 수 없이 ‘유리벽’이 아닌 ‘CCTV’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누군가에 대한 응시가 훼손될 수밖에 없는 적대적 세계야말로 배영옥 시의 관계론적 사유가 놓여있는 엄정한 현실인 것도 분명하다.

배영옥은 때로 따뜻한 관계의 몽상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것은 충분히 증폭되지 못한 채 다시금 현실의 밑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시인에게 우선적인 것은 의도된 시적 언술 속에서 세계를 상상력의 밀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옮겨 적는”(「유리벽의 독서」) 일이다. 배영옥의 시에서 개별자들 간의 견고한 결속이나 조화, 내밀한 소통과 합일의 징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흔적을 통해서나 간신히 가능하거나 그마저도 “자기도 모르게”(「흔적」) 이루어질 뿐이다. 거기 있으나 성큼 다가갈 순 없는 “차고 맑은 우물 속”(「만월」), 그곳에 무수한 ‘너’들이 있다.


맞닿아 있다고 말하면 그 간격이 보이고
떨어져 있다 하기에는
너무 캄캄한 지척. 너무 캄캄한 지척 부분

홀로 눈길을 헤치고 걸어간 자의 생애와
나의 생애가 눈송이처럼
잠시 만났다 헤어진다
(중략)
죽어도 녹지 않을
살아남아 슬픈 자들의 생애를
눈발 같다고 해도 되나. (마지막 외출) 부분


지나고 보면
모든 순간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사실 아주 멀리 유배되어 있던 것
(중략)
너는 깜빡 깜빡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몸 바꾸는 중이었을까

잠깐 터널을 통과할 때
가랑비와 진눈깨비가 서로 몸 바꾸려는 찰나에
또 다시 밝아졌다 스러지는 순간들
나만 캄캄 어두워지고. (순간의 유배) 부분


불가능하진 않지만 영속적이지는 않는 관계의 난감한 국면 앞에, 시인의 캄캄한 절망이 놓여 있다. 모든 존재들은 “잠시 만났다 헤어”져 곧 스러져버릴 눈송이처럼, 순간과 찰라 속에서만 서로를 조우할 수 있다. 배영옥의 시에서 ‘순간’의 장면은 생의 집중과 소멸이 엇갈리는 경계의 운동을 환기하기도 하지만, 이렇듯 금세 사라져버릴 관계의 안타까운 실존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맞닿아 있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은, “캄캄한 지척”을 품고 서로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간극’의 아이러니와 대응한다. ‘순간’과 ‘간극’을 통한 조우 앞에서 시인은 매번 ‘캄캄’해지지만, 그것이 아이러니인 까닭은 「전선 위의 평화」나 「너무 캄캄한 지척」이 보여주듯이 관계의 균형 역시 그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치와 결렬이라는 모순된 순간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현재에 있어 배영옥이 응시하고 사유할 수 있는 관계의 최대치라 할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시인의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환한 빛을 발한다.

배영옥의 시에 믿음이 가는 것은, 가슴 속에 뜨거운 갈증을 품고서도 시선은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는 데 있다. 뜨거움의 동력으로 누군가를 화려한 시적 수사와 비유의 체계로 언표하기에 ‘캄캄한 지척’의 중력은 너무 크다. 타자에게로 응집된 시선은 있지만 그는 명료한 실체로서 의미화되지 않는다. 배영옥 시의 서늘한 온도는, 그래서 유지된다. 시 언어의 농밀한 연금술로 타자를 혹은 간극을 변용하고 조정하는 대신, 시인은 어떤 것도 쉽게 확정짓지 않는다. “살아남아 슬픈 자들의 생애를/눈발 같다고 해도 되나”나 “너는 깜빡 깜빡/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몸 바꾸는 중이었을까”와 같은 심상한 표현에 더 마음이 가는 까닭은, 그러한 보류와 유예, 망설임으로부터 오히려 타자에 대한 따뜻한 윤리가 읽히기 때문이다. 질문으로 사유되는 ‘너’의 공백 속에서만 기어코, 나는 어떠한 훼손이나 왜곡 없이 온전한 한 순간을 만날 수 있다.



4).

언젠가 목구멍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성대를
내시경 화면으로 본 적이 있다
어두컴컴한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려고
파르르 떨고 있는 성대는
아주 작고 연약한 꽃잎이었다

내 손으로
눈 닫아걸고 귀 닫아걸고 입 닫아걸고 십년이 지났지만
너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질문 없는 대답처럼
너는 꽃이 되어 있었다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나는 얼마나 긴 침묵과 싸워야했던가
스스로 씹어 삼킨 가시는
또 얼마나 깊이 폐부를 찔러댔던가

고통의 축제는 끝이 없고
나는 얼마나 더 붉은 입술을 깨물어야하는지
또 얼마나 오래 숨죽여야하는지
목구멍에 핀 저 꽃에게 묻는다.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전문


‘너’는 무수한 것들을 대입할 수 있는 n의 자리이다. 이 시에서 그것은 ‘시’ 자체를 환기하는 강렬한 메타포로 읽힌다. 아니, 타자와 더불어 쓰여지는 시에서 너는 이미 ‘나’이며 ‘시’이다. 그 사이에 간극은 있을지언정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지우거나 괄호로 묶는, 혹은 군림하거나 억압하는 위계는 없다. 이 시는 분명 시 쓰기 작업에 얽힌 시인의 진솔하고 투명한 사유의 단상을 생생하게 접해볼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무엇을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은 유연한 탄력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지의 타자이다.

허망한 언어를 뱉지 않기 위해, 실재에 닿지 못하는 말의 놀음을 피하기 위해 시인은 “긴 침묵과 싸워야했”다. 그렇게 씹어 삼킨 언어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시인의 ‘성대’에 ‘꽃’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발설되지 않은, 발설하지 말아야 할 “작고 연약한 꽃잎”이다. 그것을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시인은 “붉은 입술을 깨물”며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하듯이, ‘붉음’이란 고통의 생기이며 “고통의 축제”이다. 시가 되기 위해, 너에게로 가기 위해 극한의 경계를 건너는 일이다. 그럴 때 꽃을 ‘지운다’는 말은 ‘피운다’는 말의 부정어법이다. 서늘하고 향기로운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지금 시인은, 연약하게 파르르 떨고 있는 성대의 붉은 침묵을 껴안고 시간을 건너는 중이다.







권채린(문학평론가(2005년《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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